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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 에바리스트 갈루아 (1811–1832)

모두에게 버림받고 모두에게 사랑받은 남자

« Je n'ai pas le temps. »

스무 해를 산 한 청년이, 죽기 전날 밤 시간에 쫓기며 갈겨쓴 몇 장의 종이. 살아서는 학교도 학회도 그를 거듭 돌려보냈지만, 그 종이에서 현대 대수학 전체가 자라났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 충분한,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이야기.

1천재의 탄생

외부 · 파리 근교 부르라렌 · 1811년 가을

혁명과 반동이 번갈아 휘몰아치던 프랑스. 1811년 10월 25일, 파리 외곽 부르라렌에서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태어납니다. 아버지 니콜라가브리엘은 자유주의 성향의 마을 시장이었고, 어머니는 라틴어와 고전을 직접 가르친 교양인이었죠. 소년은 열두 살에 기숙학교 루이르그랑에 들어가 — 처음엔 평범했지만, 곧 르장드르의 기하학 교과서를 소설처럼 단번에 읽어치우며 수학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교과 진도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서 답이 이미 끝나 있는데 풀이를 길게 적는 일을 지루해했고, 선생들은 "기이하고 폐쇄적"이라 적었죠. 천재의 조숙함과 세상의 속도가 어긋나기 시작한 첫 장면입니다.


2아버지의 죽음

내부 · 부르라렌 시장 관저 · 1829년 7월

1829년 여름, 비극이 가족을 덮칩니다. 정치적 반대파가 아버지의 이름을 도용해 악의적인 풍자시를 퍼뜨렸고(마을 신부가 연루됐다고 전해집니다), 명예에 치명상을 입은 아버지는 파리의 거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열일곱 갈루아에게 이 죽음은 평생의 상처가 됩니다. 그는 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고, 공권력과 위선에 대한 분노가 마음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3면접실의 칠판지우개

내부 · 에콜 폴리테크니크 구술시험장 · 1829년

당시 수재들의 꿈은 에콜 폴리테크니크. 갈루아는 두 번 도전합니다. 첫 시험(1827)에서 떨어진 데 이어, 아버지의 죽음 직후 치른 두 번째 구술시험에서도 미끄러집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장면은 — 그가 시험관의 장황한 질문에 분을 못 이겨 칠판지우개를 던졌다는 것. 또 다른 기록은, 시험관이 요구한 답안 형식을 그가 거부했다고도 합니다.

사실 확인 — 지우개는 전설일 수 있다
"칠판지우개를 던졌다"는 일화는 널리 회자되지만 출처가 분명치 않은 야사입니다. 확실한 건, 머릿속에서 여러 단계를 건너뛰는 그의 사고방식이 정해진 풀이 절차를 요구하는 구술시험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결국 두 번 모두 낙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차선책으로 에콜 노르말(고등사범)에 들어갑니다.

4사라지는 원고

내부 ·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 1829–1830

학교 밖에서, 갈루아는 이미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의 해답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방정식에 관한 혁명적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죠. 첫 심사를 맡은 거장 코시에게 보낸 원고는 — 흔히 "코시가 잃어버렸다"고 이야기됩니다.

사실 확인 — 코시는 무시하지 않았다
근래의 사료 연구는 코시가 갈루아의 재능을 알아보고 내용을 보강해 대상(Grand Prix)에 다시 내라고 권했다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즉 "악의적 분실"이라기보단, 합치고 다듬는 과정에서 원고가 길을 잃은 것에 가깝습니다.

코시의 조언대로 갈루아는 1830년 2월, 수정 논문을 대상 심사를 위해 아카데미 간사 푸리에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푸리에가 곧 세상을 떠나면서 그 원고마저 행방불명이 됩니다. 거장 둘에게 보낸 두 편의 논문이 잇따라 사라진 것 — 운명은 집요했습니다.


5혁명가가 되다

외부 · 파리, 7월 혁명의 거리 · 1830–1831

1830년 7월 혁명이 파리를 뒤흔드는 동안, 정작 에콜 노르말 학생들은 교내에 갇혀 있었습니다. 분노한 갈루아는 학교 교장을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가 퇴학당합니다. 학계에서도 학교에서도 내쳐진 그는 급진 공화주의에 온몸을 던집니다. 국민방위대 포병대에 가담하고, 시위와 집회의 한복판에 섰죠.

그는 두 번 체포됩니다. 한 번은 어느 연회에서 단검을 든 채 왕을 위협하는 듯한 건배사를 했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 또 한 번은 금지된 포병대 제복을 입고 무장한 채 거리에 나선 죄로. 두 번째 사건으로 그는 생트펠라지 감옥에 갇힙니다.


6푸아송의 거절

내부 · 생트펠라지 감옥 · 1831년

체포 당시 그는 불안에 차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 세 번째로 낸 논문에 대해 심사위원 푸아송에게서 아무 답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옥중에서 마침내 답이 도착합니다 — 리젝(반려). 푸아송은 논문이 "충분히 명확하지도, 충분히 전개되지도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갈루아의 발상이 시대를 너무 앞서, 당대 최고의 수학자조차 따라 읽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증명은 계수가 아니라 근(根)들의 관계로 조건을 말한다. 그것을 읽어낼 눈이 아직 없을 뿐이다.” — 갈루아가 처한 상황을 요약하면

7결투 전야 — "시간이 없다"

내부 · 책상 앞 · 1832년 5월 29일 밤

1832년 봄, 출옥한 갈루아는 한 여인 — 스테파니펠리시 포트랭 뒤 모텔 — 을 둘러싼 일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결투 신청을 받죠. 죽음을 예감한 그는 밤을 새워 친구 오귀스트 슈발리에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자신의 수학적 발상을 정리한 원고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여백 곳곳에 같은 말이 거듭 적혀 있습니다.

« Je n'ai pas le temps. » — 시간이 없다.
사실 확인 — "하룻밤에 군론을 다 썼다"는 과장
"갈루아가 결투 전날 밤 군론 전체를 처음 써냈다"는 이야기는 극적으로 부풀려진 전설입니다. 핵심 이론은 이미 여러 해에 걸쳐 완성돼 있었고, 그날 밤 그가 한 일은 흩어진 결과를 유언처럼 정리하고 요점을 남긴 것이었죠. 그렇다고 안타까움이 줄지는 않습니다 — 여백의 "시간이 없다"는, 더 다듬을 시간을 갈망한 한 천재의 마지막 목소리니까요.

8새벽의 들판

외부 · 파리 외곽 들판, 동틀 무렵 · 1832년 5월 30일

5월 30일 새벽, 권총 결투가 벌어집니다. 갈루아는 복부에 총을 맞고 들판에 홀로 버려졌다가 지나던 농부에게 발견됩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튿날인 5월 31일 스무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곁을 지킨 동생 알프레드에게 그는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 "울지 마. 스무 살에 죽으려면 내 모든 용기가 필요해."

결투의 진실 — 치정인가 음모인가
결투의 정확한 이유는 끝내 불분명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한 여인을 둘러싼 명예 다툼이었지만, 정치적 적이 꾸민 암살이었다는 음모설도 오래 제기돼 왔습니다. 상대가 같은 공화파 동지였다는 정황 등 어느 쪽도 확정되지 않은 채, 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9막간 — 그가 남긴 수학

인터미션 · 화면 가득, 그가 남긴 종이

그렇다면 그 종이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요. 250년 묵은 한 질문에 대한, 완전하고 충격적인 답이었습니다.

250년의 질문 — 5차 방정식

2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누구나 압니다.

$$ ax^{2}+bx+c=0 \;\Longrightarrow\; x=\frac{-b\pm\sqrt{b^{2}-4ac}}{2a} $$

16세기 이탈리아 수학자들은 3차·4차의 공식까지 거듭제곱근으로 찾아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믿었죠 — 5차도 곧 풀릴 것이라고. 하지만 25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지 못했고, 1824년 아벨이 마침내 "일반 5차 방정식엔 근호로 된 해 공식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왜", 그리고 "어떤 방정식이 풀리고 어떤 방정식이 안 풀리는가"의 완전한 기준은 갈루아의 몫이었습니다.

갈루아의 발상 — 방정식에 '대칭'을 붙이다

그의 천재성은 질문을 통째로 바꾼 데 있습니다. 그는 방정식의 근들을 서로 맞바꾸는 치환 가운데, 근들 사이의 모든 대수적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들만 모았습니다. 이 치환들의 모임이 바로 그가 이름 붙인 군(群, groupe) — 오늘날의 갈루아 군입니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이라는 어려운 질문이, 군의 구조라는 질문으로 번역된 순간이죠.

GALOIS' THEOREM
한 방정식이 근호(사칙연산과 \(\sqrt[n]{\ }\))로 풀린다는 것은, 그 갈루아 군이 “가해군(solvable)” 이라는 것과 정확히 동치다.

'가해군'이란, 군을 정규부분군으로 차례차례 쪼개 내려갈 때 각 단계의 몫이 모두 가환(아벨)이 되는 군을 말합니다(갈루아가 도입한 정규부분군 개념이 여기서 쓰입니다). 거듭제곱근을 한 겹씩 씌우는 일이, 군을 가환인 조각으로 한 겹씩 벗기는 일과 같다는 뜻이죠.

그래서 5차는 왜 막히는가

일반 \(n\)차 방정식의 갈루아 군은 \(n\)개의 근을 마음대로 섞는 대칭군 \(S_n\)입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 \(S_2,S_3,S_4\)는 가환 조각으로 끝까지 쪼개지지만(가해군), \(S_5\)부터는 그 안에 \(A_5\)라는 "더는 쪼갤 수 없는 비가환 단순군"이 버티고 서서 사슬을 끊어버립니다. 아래에서 직접 \(n\)을 바꿔 보세요.

가해성 사다리 — \(S_n\)은 가환 조각으로 쪼개지는가

n = 5
아래 \(\{e\}\)에서 위 \(S_n\)까지 정규부분군의 사슬을 그리고, 각 단계의 몫군을 옆에 적었습니다. 몫이 전부 가환이면 가해군(초록) — 근의 공식이 있습니다. \(n\ge5\)에선 \(A_n\)이 비가환 단순군이라 사슬이 끊겨(빨강) 일반 근의 공식이 사라집니다.

덤으로 남긴 것들

갈루아의 유산은 방정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군’이라는 말과 정규부분군 개념을 처음 세웠고, 원소가 유한개뿐인 산술 세계 — 유한체(갈루아 체) \(\mathrm{GF}(p^{n})\) — 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늘날 암호·부호이론·컴퓨터의 바탕이 되는 이 유한체에는 아예 그의 이름이 붙어 있죠.

$$ \bigl|\mathrm{GF}(p^{n})\bigr| = p^{n} $$

그리고 부분군과 부분체가 거울처럼 대응한다는 갈루아 대응(Galois correspondence)은, 대수와 기하를 잇는 현대 수학의 사고 틀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101846 — 부활

내부 · 리우빌의 서재 · 1846년

죽은 뒤 14년, 갈루아의 원고는 한 사람을 만나 비로소 빛을 봅니다. 수학자 조제프 리우빌이 흩어진 유고를 끈질기게 해독해, 1846년 자신의 저널에 「근호에 의한 방정식의 가해 조건에 관하여」를 비롯한 세 편을 발표한 것이죠. 당대가 "불명확하다"며 외면했던 그 논문이, 알고 보니 완전하고 정확했음이 세상에 증명된 순간입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대학 신입생이 1학년 대수학에서 그의 이름을 배웁니다. 군, 체, 갈루아 이론. 살아서 학교와 학회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청년은, 죽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11에필로그

스무 해. 두 번의 낙방, 세 번의 분실과 반려, 두 번의 투옥, 그리고 한 발의 총탄. 세상이 그를 받아들이기를 끝끝내 거부하는 동안, 그는 시간이 없다고 적으며 미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는 도착했고, 우리는 매년 그것을 펼쳐 읽습니다. 영화라면 마지막 자막은 이래야 할 겁니다 —

에바리스트 갈루아 · 1811–1832.
그가 끝내 갖지 못한 것은 재능도, 사랑도, 정의도 아니었다. 오직 시간이었다.

참고 자료